지구환경과학부 후배님들께

2021-03-31l 조회수 2133

안녕하세요, 먼저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제 이름은 김대현 이고요, 1999년에 지구환경과학부에 입학해서 2010년에 대기과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 후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 및 연구교수로 있다가 2014년부터는 미국 워싱턴 주 주립대학 대기과학과에서 조교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 먼 옛날 지구환경과학계열 제 1대 부학생회장이기도 했었습니다.

비록 지면을 통해서지만 저와 비슷한 길을 선택한 후배님들과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보다 많은 후배님들께 도움이 될까 생각하다가 ‘슬럼프’에 대한 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슬럼프라.. 왜 하필이면 그런 우울한 주제를 택했냐고요? 다른 무엇보다도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뭔가가 잘 될 때 탄력을 받아서 더 잘 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잘 안될 때 – 슬럼프에 빠졌을 때 – 거기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능력도 못지 않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명절이면 친척분들이 다 같이 모여 화투놀이를 즐겼습니다. 오죽하면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 ‘설날에 하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를 쓰시오’ 라는 시험문제에 ‘화투놀이’ 라고 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희 아버지께서는 돈을 잃으시는 경우가 드물었고 대부분의 경우에 돈을 따셨습니다. 아버지 – 평범한 회사원 이십니다 – 의 비결이 궁금해진 저는 어느 날 아버지께 도대체 어떻게 하시는 것인지 여쭈어 보았고 아버지께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운 좋게 패가 잘 들어왔을 때 많이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 나쁘게 내 패가 좋지 않을 때 집중해서 적게 잃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이죠.

누구에게나 종종 찾아오는 슬럼프라는 것을 저도 예외 없이 많이 겪어 보았습니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힘들게 하는 녀석이지요. 태풍이나 지진처럼 어떤 때에는 약하게 오고 또 가끔은 강하게 오기도 하더군요. 하여튼 그 녀석이 찾아오면 하던 일이 재미가 없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좀 더 증상이 심해지면 모든 일들을 ‘될대로 되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게 되곤 했습니다. 학부시절 한 학기를 초 대형 슬럼프와 함께 하여 특급 마무리 투수의 방어율 같은 학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런 경험에서 제가 느낀 것은 앞서도 말씀드렸 듯이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번 빠져든 슬럼프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을 쉽게 다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때문에 슬럼프라는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슬럼프들이 언제 찾아왔었는지 돌아보았더니 몇 가지 유형이 있었습니다. 소형 급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중형 급은 내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특히 반갑지 않은 대형 급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질 때 찾아오더군요 (네. 맞습니다, 연애 문제는 초 대형 급을 몰고 오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문제는 제가 가정이 있어서 별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 할 것 같아 여기서는 논외로 합니다).

평소에 의욕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지만, 과음한 다음날이나 몸살에 걸린 날에는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또 그럴 때면 야심차게 세웠던 매일 매일의 계획이 어긋나게 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되기가 쉬웠습니다. 이런 소형 급의 경우에는 내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을 자각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더군요.

‘하기 싫어서’, ‘지쳐서’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다른 외부 요인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제 모습을 여러 번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정말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공부가 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겠지만 내가 공부가 하기 싫어서 지지부진 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다른 요인으로 그 탓을 돌리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었습니다. 내가 지친 것이라면 잠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쉬면서 재충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연구 혹은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떤 문제에 막혀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날이 몇 일, 혹은 몇 주 지속될 때가 있습니다. 내 연구 결과를 신명 나게 발표했는데 누군가가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을 콕 집어 날카로운 질문을 해서 당황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면 ‘내가 이것도 못하면서/모르면서 이 공부를 계속 해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이런 경우에 저는 무엇을 아는지 아는 것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당시에 조금은 힘들지라도 ‘아 내가 이걸 모르는 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또 가끔의 큰 성취보다는 작은 성취를 자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더군요. 언젠가부터 저는 공부가 혹은 뭔가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으면 주변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고 3때 밤 12시가 넘어 제 방 가구 구조를 바꾼답시고 책장의 책을 모두 빼고 책장과 책상의 위치를 바꾸다가 식구들을 모두 깨우고 어머니께 혼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무심코 해오던 일인데 얼마전에 주변을 정돈하는 것이 제게 적잖은 성취감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뭔가 잘 되지 않을 때 제게 성취감을 주는 일을 함으로서 더 깊은 슬럼프에 빠지는 것을 막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계기를 주는 것 같아 요새도 어딘가 막혀있는 것 같을 때 저는 주변 정리를 시작합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직장을 잡을 수 있을까?’, ‘내가 가정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경기가 어렵다고 하고,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하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아 보여서 불안한 마음에 더 많이 알아보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더 꼼꼼히 잘 세우고, 착실하게 계획대로 진행하려고 하는데, 그 계획이 자꾸 틀어질 때, 그래서 미래가 너무나 불투명한 것 같이 느껴질 때, 대형 급 슬럼프가 불청객처럼 찾아오더군요.

기상청의 날씨예보가 맞지 않는다는 불평을 많이 들으셨지요? 날씨라는 것은 수 많은 요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요인들을 모두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항상 ‘불확실성’을 동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예측을 해도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요.

다소 무책임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세우는 계획도 미래에 대한 예측 인지라 날씨예보와 마찬가지로 불확실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먼 미래를 예측하려 할 수록 그 불확실성은 더 커질테고요. 삶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고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이후에는 계획을 완벽하게 추진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낙담하는 대신, 달라진 환경과 생각하지 못했던 요인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고려하여 원래의 계획을 수정하는 일에 집중하기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이런 크고 작은 슬럼프들이 찾아오는 것을 아무리 용을 써도 막을 수 없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슬럼프에서 빨리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더군요. 제 경우에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라는 식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빠져 나오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그래, 또 왔구나. 이번엔 왜 왔는지 한번 보자’ 라고 받아들였을 때 벗어나기가 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힘들어하던 시기에 저를 위로해주시고 제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던 많은 분들이 계셨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단 한 분의 후배님께 라도 제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각자의 꿈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계실 후배님들께 멀리 시애틀에서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는 것으로 부족한 칼럼을 마칩니다. 어디에선가 뵙기를 바라며 그럼 이만!

p.s. 칼럼에 제 소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몇 줄 더 적어봅니다. 저는 워싱턴 주 주립대학 대기과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열대지역의 구름, 특히 적운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열대지역의 적운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흥미로운, 그리고 그만큼 어려운 현상이고, 전 지구의 순환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입니다. 열대지역의 적운을 이해하기 위한 제 여정은 대학원생 시절에 시작되었고요,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리라 생각합니다. 제 연구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daehyun@uw.edu) . 진로상담, 등등 역시 환영입니다.


***** Profile *****
워싱턴 주 주립대학 교수 | 김대현 daehyun@uw.edu

1999.3 - 2003.8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대기과학전공(이학사)
2003.9 - 2010.2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이학박사)
2010.3 - 2014.1 Columbia University 박사후연구원 및 연구교수
2014.2 - 현 재 University of Washington 조교수